동프랑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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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프랑크 왕국은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카롤링거 제국이 분할되면서 성립되었으며, 오늘날의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이 왕국은 동프랑크라는 용어가 처음에는 프랑크족의 지역을 가리켰으나, 루트비히 2세 시대에 동부 왕국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면서 시작되었다. 루트비히 2세 이후 왕권이 약화되고 공작들의 세습 통치가 강화되면서, 911년에는 카롤링거 왕조가 아닌 콘라트 1세가 왕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작센 왕조의 하인리히 1세가 왕위를 계승하며 왕국을 강화했고, 그의 아들 오토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을 건설하여 동프랑크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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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프랑크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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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토착어 명칭 | lang: la text: Regnum Francorum orientalium |
통용되는 긴 명칭 | 동프랑크 왕국 |
일반 명칭 | 동프랑크 |
시대 | 중세 |
정치 체제 | 군주제 |
수도 | 프랑크푸르트 레겐스부르크 |
공용어 | 중세 라틴어 고지 독일어 고대 프리슬란트어 고대 네덜란드어 고대 저지 독일어 슬라브어 |
종교 | 가톨릭교회 게르만 신화 |
통화 | 페니히 |
현재 국가 | 오스트리아 독일 체코 스위스 이탈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
별칭 | 동프랑크인 |
역사 | |
사건 시작 | 베르됭 조약 |
사건 1 | 메르센 조약 |
이전 국가 | 프랑키아 카롤링거 제국 |
이후 국가 | 신성 로마 제국 독일 왕국 |
통치자 | |
직함 | 프랑크인의 왕 |
지도자 1 | 루트비히 독일인 (최초) |
지도자 2 | 오토 대제 |
재임 기간 1 | 843년–876년 |
재임 기간 2 | 936년–962년 (973년 사망 시까지 직함 유지) |
기타 | |
2. 용어
'동프랑크 왕국'(orientalis Francialat)이라는 용어는 원래 프랑코니아 지역을 가리켰고, '동프랑크인'(orientales Francilat)은 라인강 동쪽에 살던 프랑크족을 지칭하는 말이었다.[4][27] 이 용어를 더 넓은 의미, 즉 동부 왕국 전체를 가리키는 데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루트비히 2세 독일왕의 궁정에서였다.[4] 동프랑크 왕국은 프랑크족의 중심지였던 옛 오스트라시아의 동쪽 절반과 동일시될 수 있었기에, 루트비히 2세가 이 이름을 선택한 것은 오스트라시아 서부인 로타링기아까지 차지하려는 그의 야망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4][27] 실제로 루트비히 2세는 메르센 조약으로 로타링기아 동쪽 절반을, 그의 아들 루트비히 3세는 리브몽 조약으로 서쪽 절반까지 얻었다.[27]
오스트라시아 전체를 확보하자 '동프랑크'라는 이름의 중요성은 줄어들었다. 루트비히 2세의 손자인 카린티아의 아르눌프 시대에는 이 용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왕국은 단순히 '프랑크'(Francialat)라고 불렸다.[5][28] 작센인인 독일의 하인리히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왕권이 프랑크족의 손을 떠나자, 나라는 단순히 '왕국'(regnumlat)으로, 왕은 '왕'(rexlat)으로 불리게 되었다.[29]
하지만 필요할 때는 '동프랑크'라는 명칭이 다시 사용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921년 서프랑크와 맺은 본 조약에서 하인리히 1세는 자신을 '동프랑크인의 왕'(rex Francorum orientaliumlat)이라고 칭했다.[6][31] 오토 1세가 962년 로마 황제가 되면서 동프랑크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초기에는 '왕국'과 '제국'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왕국'(regnumlat)과 '제국'(imperiumlat)의 구분이 명확해진 것은 부르군트 왕국이 제국에 편입된 1032년 이후로 여겨진다.[30]
11세기 서임권 투쟁을 거치면서 '왕국'은 점차 '독일 왕국'(Regnum Teutonicorumlat)으로 불리게 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을 구성하는 세 왕국(독일, 이탈리아, 부르군트)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30] 12세기에 이르러 역사가 프라이징의 오토는 카롤링거 시대의 용어를 설명하면서, "프랑크인의 동부 왕국"(orientale Francorum regnumlat)이 "지금은 게르만인의 왕국"(regnum Teutonicorumlat)이라고 불린다는 점을 언급해야 할 정도로 '동프랑크 왕국'이라는 명칭은 과거의 것이 되었다.[7][32]
3. 역사
동프랑크 왕국의 역사는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카롤링거 제국이 분할되면서 시작되었다. 경건왕 루이의 아들 루트비히 2세는 제국의 동부 지역, 즉 주로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영토를 상속받았다. 이 영토에는 작센 공작령, 오스트라시아, 알레만니아, 바이에른 공작령, 케른텐 변경백령 등이 포함되었다.[8][9] 당시 연대기 작가 프름의 레기노는 동프랑크가 "genere moribus lingua legibus|게네레 모리부스 링과 레기부스la" 즉 "인종, 관습, 언어 및 법률"이 다른 다양한 민족(diversae nationes populorum|디베르사이 나티오네스 포풀로룸la)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기록했다.[10][11]
869년 메르센 조약을 통해 동프랑크는 분할된 로타링기아의 동부 지역을 획득하였다. 이후 비만왕 샤를 시대에 잠시 모든 프랑크 영토가 재통합되기도 했으나, 888년 그가 폐위되면서 동프랑크 귀족들은 케른텐의 아르눌프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다.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왕인 루트비히 4세 유아왕이 911년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동프랑크의 주요 공작들(작센, 프랑켄, 바이에른, 슈바벤)은 카롤링거 왕조 출신이 아닌 자신들 중 한 명인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를 왕으로 선출하였다. 이는 왕위 계승 방식에 있어 중요한 변화를 의미했다. 그러나 콘라트 1세는 다른 강력한 공작들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특히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의 도전에 직면했다.
콘라트 1세는 임종 시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하인리히 1세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919년 하인리히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작센 왕조가 시작되었다. 하인리히 1세는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 조직을 정비하는 데 힘썼으며, 그의 아들 오토 1세에게 안정된 왕국을 물려주었다. 오토 1세는 962년 로마에서 황제로 즉위하며 신성 로마 제국의 시대를 열었다.
3. 1. 베르됭 조약과 동프랑크 왕국의 성립 (843년)
840년 6월 20일 황제 경건왕 루이가 사망한 후, 그의 세 아들들은 3년간의 내전을 벌였다. 마침내 843년 8월, 세 아들과 상속인들은 베르됭 조약을 체결하여 카롤링거 제국을 분할했다. 영토 분할은 주로 뫼즈강, 셸데강, 손강, 론강을 경계로 이루어졌다. 장남인 로타르 1세는 황제 칭호와 함께 중프랑크 왕국을 차지했고, 대머리 샤를은 서프랑크 왕국을, 루트비히 2세는 동쪽의 영토를 받았다. 루트비히 2세가 받은 동부 지역은 대부분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곳으로, 작센 공작령, 오스트라시아, 알레만니아, 바이에른 공작령, 케른텐 변경백령 등이 포함되었다.
당시 동프랑크의 ''풀다 연대기''(Annales Fuldenses)는 왕국이 "셋으로 나뉘었다"고 기록하며, 루트비히 2세가 "동부 지역을 상속했다"고 전한다.[8] 서프랑크의 ''베르탱 연대기''(Annales Bertiniani)는 루트비히 2세 영토의 범위를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는데, "분할 시, 루이는 라인강 너머의 모든 땅을 얻었고, 라인강 이쪽으로는 슈파이어, 보름스, 마인츠 도시와 그들의 백작령을 얻었다"고 기록했다.[9] 서프랑크 왕국은 루트비히 2세의 이복 동생인 대머리 샤를에게 돌아갔으며, 두 왕국 사이에는 이탈리아 왕국을 포함한 중프랑크 왕국이 형인 황제 로타르 1세에게 주어졌다.
동프랑크 왕국은 전통적인 프랑크족의 핵심 지역인 오스트라시아의 약 3분의 1을 포함했지만, 나머지 영토는 대부분 5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프랑크 제국에 편입된 땅으로 구성되었다.[10] 여기에는 알레만니아, 바이에른, 작센, 튀링겐 공작령과 같은 공작령들과 덴마크인 및 슬라브족이 거주하는 북부 및 동부 변경백령이 포함되었다. 당시 연대기 작가 프름의 레기노는 동프랑크의 다양한 민족(''diversae nationes populorum'')이 주로 게르만어와 슬라브어를 사용했으며, "인종, 관습, 언어 및 법률"(''genere moribus lingua legibus'') 면에서 "서로 구별"될 수 있다고 기록했다.[10][11]
3. 2. 루트비히 2세 독일왕 시대 (843년 ~ 876년)
840년 6월 20일 황제 경건왕 루이가 사망한 후, 그의 세 아들들은 3년간의 내전을 벌였다. 843년 8월, 이들은 베르됭 조약을 체결하여 카롤링거 제국을 분할했다.[17] 영토 분할은 주로 뫼즈강, 셸데강, 손강, 론강을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장남 로타르 1세는 황제 칭호와 중프랑크 왕국을 차지했고, 넷째 아들 대머리 샤를은 서프랑크 왕국을, 셋째 아들 루트비히 2세는 주로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동부 지역을 상속받았다. 이로써 동프랑크 왕국이 성립되었다. 루트비히 2세가 차지한 영토에는 프랑켄(오스트라시아), 작센, 알레만니아(슈바벤), 바이에른, 케른텐, 튀링겐 등이 포함되었다.
당시 동프랑크의 ''풀다 연대기''(''Annales Fuldenses'')는 왕국이 "셋으로 나뉘었다"고 묘사하며, 루트비히 2세가 "동부 지역을 상속했다"고 기록했다.[8] 서프랑크의 ''베르탱 연대기''(''Annales Bertiniani'')는 루트비히 2세 영토의 범위를 더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분할 시, 루이는 라인강 너머의 모든 땅을 얻었고, 라인강 이쪽으로는 슈파이어, 보름스, 마인츠 도시와 그들의 백작령을 얻었다."[9] 서프랑크 왕국은 루트비히 2세의 이복 동생인 대머리 샤를에게 돌아갔고, 두 왕국 사이에는 이탈리아 왕국을 포함한 중프랑크 왕국이 형인 황제 로타르 1세에게 주어졌다.
동프랑크 왕국은 전통적인 프랑크족의 핵심 지역인 오스트라시아의 약 3분의 1만을 포함했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5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프랑크 제국에 병합된 지역들로 구성되었다.[10] 여기에는 알레만니아, 바이에른, 작센, 튀링겐과 같은 공작령들과, 덴마크인 및 슬라브족에 대한 북부 및 동부 변경백령이 포함되었다. 당시 연대기 작가 프름의 레기노는 동프랑크의 "다양한 민족"(''diversae nationes populorum'')이 대부분 게르만어와 슬라브어를 사용하며, "인종, 관습, 언어 및 법률"(''genere moribus lingua legibus'')에 따라 "서로 구별"될 수 있다고 기록했다.[10][11]
중프랑크 왕국의 황제 로타르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영토는 세 아들에게 다시 분할되었다. 로타르 1세의 차남 로타르 2세는 동프랑크와 서프랑크 사이에 위치한 지역을 상속받아 로타링기아 왕국을 세웠으나, 적법한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이에 869년, 동프랑크의 루트비히 2세와 서프랑크의 대머리 샤를은 메르센 조약을 체결하여 로타링기아를 분할했다. 이 조약으로 동프랑크는 메츠와 아헨을 포함한 로타링기아 동부 지역을 획득했다.[18] 로타르 1세의 장남이자 당시 이탈리아의 왕이었던 루도비코 2세는 이 분할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힘이 없었다. 분할된 로타링기아 지역은 이후 오랫동안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분쟁 지역이 되었다.
3. 3. 카를 3세 비만왕 시대 (876년 ~ 887년)
876년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세 아들이 동프랑크 왕국을 분할하여 상속했다. 삼남인 카를 3세는 이때 알레만니아 지역을 물려받았다. 장남 카를만은 바이에른을, 차남 루트비히 3세는 작센을 각각 계승했다.
당시 바이에른 왕 카를만은 신성 로마 황제 루도비코 2세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받았으나, 875년 루도비코 2세가 사망하자 실제 이탈리아를 차지하고 황제가 된 인물은 숙부인 서프랑크 왕 샤를 2세였다. 876년 루드비히 2세가 사망한 후, 황제 샤를 2세는 제국 통일을 목표로 동프랑크를 침공했으나, 10월 8일 안데르나흐 전투에서 카를 3세를 포함한 동프랑크 세 형제의 연합군에게 격파당했다[19][20]。 877년 샤를 2세가 사망하자 카를만이 이탈리아를 탈환했다. 그러나 879년 카를만은 병을 얻었고, 후계자 없이 880년에 사망했다. 그의 이탈리아 왕위는 알레마니아 왕이었던 카를 3세에게 계승되었고, 바이에른은 작센 왕 루트비히 3세에게 넘어갔다.
한편, 작센 왕 루트비히 3세는 879년 서프랑크 왕국의 계승 분쟁에 개입하여 리브몽 조약을 통해 로타링기아 서부 지역을 획득했다[18]。 이후 형 카를만으로부터 바이에른까지 상속받아 알레마니아를 제외한 동프랑크 왕국의 대부분을 통치하게 되었다. 하지만 루트비히 3세 역시 882년에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그의 모든 영토는 동생인 카를 3세에게 상속되었다.
이로써 카를 3세는 동프랑크 왕국 전체를 통일하게 되었다[18]。 그는 이미 880년 형 카를만으로부터 이탈리아 왕위를 계승했으며, 881년에는 교황 요한 8세에 의해 제6대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했다[21]。 나아가 884년에는 서프랑크 왕위까지 겸하게 되면서, 카롤루스 대제 사후 분열되었던 프랑크 왕국 전체를 일시적으로 재통일했다[22]。
그러나 이러한 통일은 상속에 의해 이루어진 잠정적인 결과였으며, 카를 3세 본인은 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능력이나 의지가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887년 모라비아 공작 스바토플루크 1세의 침입과 노르만인의 계속되는 공격에 미온적으로 대처하면서 귀족들의 큰 불만을 샀다. 결국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켜 카를 3세를 폐위시켰다[23]。 그의 폐위 이후 동프랑크에서는 케른텐의 아르눌프가 새로운 왕으로 선출되었고, 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이탈리아 왕국은 다시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면서 프랑크 제국의 재통일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3. 4. 케른텐의 아르눌프 시대 (887년 ~ 899년)
888년, 귀족들에 의해 비만왕 샤를이 폐위된 후, 동프랑크에서는 카를만의 서자인 케른텐의 아르눌프가 새로운 왕으로 선출되었다. 아르눌프는 전임자인 샤를 3세와는 달리 협상보다는 군사적 해결을 선호하는 적극적인 군주였으며, 즉위 후 활발한 대외 원정을 추진했다.
먼저 아르눌프는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을 겪던 서프랑크 왕국에 개입하여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또한 로타링기아를 확보하여 자신의 서장자인 츠벤티볼트를 그곳의 왕으로 임명했다. 로타링기아 남쪽의 부르군트 왕국이 로타링기아 통일을 시도했으나, 아르눌프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더 나아가 아르눌프는 비만왕 샤를의 양자였던 루이 3세가 프로방스 왕국의 왕위에 오르는 것을 지원하기도 했다. 891년 9월에는 루뱅 전투에서 노르만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24]
동쪽 국경에서는 대모라비아 왕국과의 지속적인 분쟁 끝에 보헤미아 지역을 할양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894년에는 교황의 요청에 응하여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이 원정에서 당시 신성 로마 황제였던 귀도와 그의 아들 람베르토를 격파하고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했다. 896년에는 귀도가 사망하자 로마에서 신성 로마 황제로 대관하는 영예를 안았다.[25]
그러나 같은 해 아르눌프는 중병에 걸렸고, 이로 인해 대립 황제였던 람베르토에 대한 군사 작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눌프가 병상에 있는 동안 이탈리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으며, 람베르토는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동쪽에서는 모라비아와 새롭게 등장한 마자르족의 침입이 계속되었고, 로타링기아에서도 내란이 발생하는 등 왕국은 안팎으로 어려움에 직면했다. 하지만 병석의 아르눌프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898년 람베르토가 사망하면서 아르눌프는 유일한 황제가 되었지만, 당시 그의 권위는 실질적인 의미를 갖기 어려웠다.
결국 아르눌프는 899년에 사망했고, 그의 적자인 루트비히 4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3. 5. 루트비히 4세 유아왕 시대 (899년 ~ 911년)
899년 케른텐의 아르눌프가 사망한 후, 그의 어린 아들인 프랑크의 루트비히 4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루트비히 4세는 '유아왕'이라는 별명처럼 매우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통치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이 시기 동프랑크 왕국의 중앙 권력은 더욱 약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왕권이 약화된 틈을 타 바이에른, 슈바벤, 프랑켄, 작센, 로타링기아 등 주요 지역의 공작들은 왕이 임명한 관리라는 지위를 넘어, 자신들의 영지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세습 통치자로서의 입지를 강화해 나갔다.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어린 왕은 점증하는 지역 세력의 도전과 때때로 발생하는 반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911년, 루트비히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동프랑크 왕국을 다스려온 카롤링거 왕조의 혈통은 마침내 단절되었다. 이에 작센, 프랑켄, 바이에른, 슈바벤의 유력 귀족들은 카롤링거 가문 출신을 왕으로 선출하던 기존의 관례를 따르지 않기로 결정했다. 911년 11월 10일, 이들 귀족은 자신들 중 한 명인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하였다. 이는 동프랑크 왕국 역사에서 카롤링거 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3. 6. 콘라트 1세 시대 (911년 ~ 918년)
911년, 동프랑크 왕국의 작센, 프랑켄, 바이에른, 슈바벤 귀족들은 카롤링거 왕조 출신을 왕으로 선출하는 전통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고, 911년 11월 10일 자신들 중 한 명인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콘라트 1세는 다른 공작들 중 한 명이었기에, 그들 위에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로타링기아 공국은 콘라트 1세를 인정하지 않고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 왕인 샤를 3세를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하며 동프랑크 왕국에서 이탈하였다.
내부적으로도 콘라트 1세의 통치는 불안정했다. 강력한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는 915년까지 콘라트 1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 역시 반란을 일으켰고, 콘라트 1세는 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결국 목숨을 잃게 되었다.
죽음을 앞둔 콘라트 1세는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가 가장 유능하며 왕위를 계승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로써 왕위는 프랑크족에서 작센족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콘라트 1세는 918년에 사망했다.
3. 7. 작센 왕조와 하인리히 1세 (919년 ~ 936년)
911년 작센, 프랑켄, 바이에른, 슈바벤의 귀족들은 더 이상 카롤링거 왕조 출신을 왕으로 선출하는 전통을 따르지 않고, 911년 11월 10일 그들 중 한 명인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콘라트 1세는 공작 중 한 명이었기에 다른 공작들 위에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는 915년까지 콘라트 1세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와의 싸움은 콘라트 1세의 목숨을 앗아갔다.
콘라트 1세는 임종 시 가장 유능한 후계자로 작센의 하인리히를 선택했다. 이 왕위 계승은 프랑크족에서 작센족으로 왕권이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작센족은 과거 샤를마뉴의 정복 사업 당시 큰 고통을 겪었던 부족이었다. 919년, 프리츠라르에서 작센족과 프랑켄족에 의해 왕으로 선출된 하인리히 1세는 다른 공작들을 제압해야 했다. 그는 자신을 여러 공작들의 대표자로서 위치시키면서 다른 공작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공작들을 하나로 묶는 국가 조직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하인리히 1세는 왕국의 분할 상속 관행을 폐지하고, 로타링기아를 탈환했으며, 마자르인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그는 서프랑크 왕국에서 일어났던 왕권의 붕괴를 막았고,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오토 1세가 활용할 국가 기구를 다졌다. 936년 7월 그가 사망했을 때, 하인리히 1세는 오토 1세에게 훨씬 더 강력한 왕국을 물려주었다. 오토 1세는 962년 로마에서 황제로 즉위하며 신성 로마 제국 시대를 열었다. 다만, 당시에는 '제국'으로 불렸고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명칭은 약 300년 후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3. 8. 오토 1세와 신성 로마 제국 (936년 ~ 973년)
911년 작센, 프랑켄, 바이에른, 슈바벤의 귀족들은 더 이상 카롤링거 왕조 출신을 왕으로 선출하는 전통을 따르지 않고, 그들 중 한 명인 콘라트 1세를 911년 11월 10일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공작 중 한 명이었던 콘라트 1세는 다른 공작들 위에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 매우 어려움을 겪었다. 작센의 공작 하인리히 1세는 915년까지 콘라트 1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고, 바이에른의 아르눌프와의 싸움은 콘라트 1세의 목숨을 앗아가는 결과를 낳았다.
콘라트 1세는 임종 시 가장 유능한 후계자로 작센의 하인리히를 선택했다. 이로써 왕위는 샤를마뉴의 정복 과정에서 큰 고통을 겪었던 프랑크족에서 작센족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프리츠라르에서 작센족과 프랑켄족에 의해 왕으로 선출된 하인리히 1세는 다른 공작들을 제압하는 데 힘썼고,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오토 1세가 완전히 활용할 수 있는 국가 기구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936년 7월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하인리히 1세는 서프랑크 왕국에서 일어났던 왕권의 붕괴를 막았고, 그의 후계자 오토 1세에게 훨씬 더 강력한 왕국을 물려주었다.
하인리히 1세의 뒤를 이은 오토 1세는 962년 로마에서 황제로 즉위하였고, 이로써 신성 로마 제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4. 왕권
루이 1세 경건왕이 사망할 당시, 카롤링거 제국의 레갈리아(왕권의 상징물)는 황제 로타르 1세와 서프랑크의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왕)가 나누어 가졌다.[12][33] 당시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루트비히 2세 독일왕은 왕관 보석이나 전례 서적 등 카롤링거 왕권과 관련된 어떤 상징물도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동프랑크 왕국의 왕권 상징과 의례는 처음부터 새롭게 만들어져야 했다.[12][33]
초기부터 동프랑크 왕국은 서프랑크보다 왕의 선출에 대해 더 공식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13] 900년경에는 '초기 독일 의식'이라고 불리는 왕의 대관식 전례서(오르도)가 작성되었다. 이 전례서에 따르면, 대관을 집전하는 주교는 먼저 "지명된 군주"(''princeps designatus'')에게 교회와 백성을 보호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그 다음 백성들을 향해 군주에게 복종하고 그의 법을 따를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이에 백성들은 Fiat, fiat!|피아트, 피아트!lat"(그렇게 되게 하소서!)라고 외쳤는데, 이 행위는 나중에 왕의 정당성을 나타내는 "인정"(Recognition) 의례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인정' 절차가 포함된 가장 오래된 대관식 의례이며, 이후 영향력 있는 로마-게르만 교황 의례서에 통합되었다.[13][34]
888년 6월, 카린티아의 아르눌프 왕은 마인츠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는 동프랑크 왕국의 세 대주교인 쾰른의 빌리베르트, 마인츠의 리우트베르트, 트리어의 라트보드와 함께 서프랑크 왕국의 랭스의 풀크, 루앙의 요한 1세, 그리고 보베와 노용의 주교들이 참석했다.[14][34] 월터 울만에 따르면, 서프랑크 성직자들의 참석은 동프랑크의 "빈약한 교회 사상"을 보완하고, 서프랑크에서 중시되던 왕의 신성함과 성유 의식을 도입하기 위함이었다.[14] 이는 "카롤링거 유산의 두 부분을 동화시키는 과정의 첫 번째 단계"로 평가받는다.[14][34] 895년 트리부르에서 열린 또 다른 교회 공의회에서는 성직자들이 아르눌프가 사람의 선택이 아닌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선언했고, 아르눌프는 이에 화답하여 교회와 그 특권을 모든 적으로부터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다.[14]
899년 아르눌프가 사망하자, 그의 어린 아들 루트비히 4세 유년왕이 왕위를 계승하여 대관식을 치렀다. 하지만 이때 성유 의식은 거행되지 않았고, 어린 왕은 마인츠의 하토 1세 대주교의 후견을 받았다. 루트비히 4세의 대관식은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는 독일 역사상 최초의 대관식이다.[14][34] 911년 9월 말 루트비히 4세가 사망하자, 당시 프랑코니아 공작이었던 콘라트 1세 (독일)가 11월 10일에 새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콘라트 1세는 성유를 받은 최초의 독일 왕이 되었다.[14][34] 이후 하인리히 1세 (독일)는 대관식에서 성유를 받는 것을 거부했지만, 오토 1세 (신성 로마 제국) 이후의 왕들은 다시 성유 의식을 행했다.[34]
5. 종교
수도원은 프랑크 왕국의 군주에게 세 가지 기본적인 의무를 졌다. 이는 군 복무, 매년 돈이나 노동력을 기증하는 것, 그리고 왕족과 왕국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칭하여 라틴어 기술 용어로 ''servitium regis''("왕의 봉사")라고 불렀다.[15] 817년경 작성된 수도원 목록과 그 의무를 기록한 ''수도원 봉사 고지서(Notitia de servitio monasteriorum)''에 따르면, 군사 및 금전적 봉사의 부담은 서프랑크보다 동프랑크에서 더 가벼웠던 것으로 보인다. "라인강 너머"(''ultra Rhenum''), 즉 동프랑크 지역으로 기록된 수도원 중 이러한 의무를 지는 곳은 로르슈 수도원, 슈투턴 수도원, 몬제 수도원, 테겐제 수도원 네 곳뿐이었다.[16]
6. 역대 군주
(분할 통치)